[알면 the 이로운 금융] 32. 정량보다 정성이 중요한 금융도 있다

2021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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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난 6년간 사회적경제기업가들과 자조기금을 조성해 운영해 왔다. 자조기금이란 동질한 특성을 가진 구성원들의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운영되기에 ‘관계금융’의 대표적인 형태이다. 그동안 사회적경제기업을 대상으로 380건(150억원) 이상의 대출을 실행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강한 추진력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가는 기업가를 마주할 때면 자극되기도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은 터널 속에서 고군분투를 하는 기업가를 볼 때면 만감이 교차한다. 자기 자본으로 투자하는 자산가라면 독자적인 철학과 판단 기준에 따라 실행하겠지만, 타인의 자본을 운용하는 금융인이기에 상환 가능성을 좀 더 고민하게 된다. 이들의 미래 가치를 온전히 평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일반적으로 사업경력이 길고 규모 있는 기업은 대출 시점에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공인된 재무제표, 신용평가기관의 신용등급 등 정량 정보를 기반으로 심사한다. 계량화된 정보는 시스템적으로 처리할 수 있어 관리 비용을 절감하고, 규모의 경제를 꾀할 수 있다. 이런 기업들은 규모의 경제가 가능한 시중은행들이 주로 담당하며, 이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수수료, 금리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기업들이 선호한다. 반면에 사업경력이 짧고 영세한 중소기업은 신뢰할만한 정량 정보가 부족하거나 평가점수가 낮아 계량화되지 않은 정성 정보가 중요하다. 이런 데이터는 장기간 관찰에 의하여 축적되며 전달이 쉽지 않은 정보다. 심사역이 판단하는 기업가의 성품이나 신뢰도, 기업의 자금결제 성향, 기업가 평판 등이 이에 해당하며 금융기관과 기업이 장기간 거래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관계금융의 산물이다.

특히, 사회적경제기업은 일반 중소기업과 운영방식이 다르다. 이익 극대화보다는 소셜 미션 달성을 우선시하며 이사회에 근로자 대표, 사외이사를 포함해 민주적인 운영을 강조한다. 배분 가능한 이익이 발생하면 2/3는 사회적 목적을 위해 재투자해야 한다. 협동조합의 경우 의사결정권이 주식 수에 의존하지 않고, 개인별로 동등한 의사결정 권한(1인 1표)을 갖기 때문에 주식회사의 리더십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조합원의 공동 책임하에서는 채무 계약이나 채무이행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할 수 있다고 평가받는다. 경영자의 역량을 중요하게 평가하는 금융기관은 정기적으로 바뀌는 거버넌스를 믿고 금융거래를 하기 어렵다. 이들을 정성적으로 평가해야 하는데, 금융기관에는 충분한 정보가 없다. 따라서 상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기 어렵다. 금융기관이 기업의 정성 정보를 축적해 정보 비대칭을 해소하고, 이를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자금을 공급할 수 있게 해줄 키(key)가 바로 관계금융이다.

관계금융의 단점도 있다. 기업과 긴밀한 관계 때문에 금융기관이 객관적인 심사를 할 수 없다는 위험이 있다. 기업은 위기에 처했을 때 도산을 피하고자 추가 대출을 요청하는데, 금융기관은 이미 보유한 대출을 회수하기 위해서라도 기존 대출의 기한을 연장해주고 추가 대출에 동의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코로나19와 같은 외부환경 변화로 기업들이 생존 갈림길에 서 있을 때 관계금융에 충실한 금융기관은 기업 회생을 위해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모니터링, 경영 컨설팅, 대손으로 인해 단기적으로 비용이 늘어날 수 있다.

그러나 기업에 위기란 일상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기업가는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혁신하며 성장한다. 오늘의 위기는 내일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금융기관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의 가능성을 평가하고, 독자적인 판단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그 시작은 신뢰에 기반한 관계금융에서 비롯된다. 관계금융에 충실했다고 알려진 스페인 라보랄쿠차(舊 노동인민금고), 퀘벡 밴시티 신협 등은 금융위기 속에서 안정적으로 성장하면서 사회연대경제 성장을 견인해 왔다. 위기 속에서도 조합원을 비롯한 이해관계자들과 장기적으로 축적한 신뢰가 위기 이후 단단한 수익기반이 됐고, 운영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국내에도 다수 사회적경제기업과 종사자들의 자조기금이 운영되고 있으며, 사회적 금융을 수행하는 금융기관이 늘어나고 있다. 혹시 장기화하는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경제기업을 어떻게 평가할지 고민하는 금융인이 있다면 묻고 싶다. 단기적인 위험을 줄이고 회피하면서 사업을 축소할 것인가? 기업들과 장기적인 신뢰를 구축하면서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의 이익 기회를 얻을 것인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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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운넷=이상진 한국사회혁신금융 대표 sjlee@ksifinanc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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